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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양반들의 안빈낙도

프리맨10 2013. 1. 25. 13:23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이 즐겨 노래한 것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가난한 가운데서 공부하는 즐거움이었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오로지 가난한 가운데서 도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말을 해왔다.

 

그래서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은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에 만족하는 내용의 많은 시가들을 남겼다. “면앙정가(俛仰亭歌)”의 작가로 잘 알려진 조선 중기 명종, 선조 때의 문신 송순(宋純)의 아래 시조를 보자.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한 가난한 선비가 십년을 애써서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은 후 자신과 달, 청풍이 한 칸씩을 차지하고 나니 강산은 들일 방이 없어 둘러 두고 보리라는, 그야말로 청빈한 사대부의 고귀한 사상과 자연이 초가삼간을 매개로 합일되어 승화되는 내용의 아름다운 시조이다. 댓잎 사이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기는 송순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송순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이처럼 청빈한 삶을 자랑스레 여겼다.

 

하지만 송순의 실제 삶은 안빈낙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데 그의 허위가 있다. 송순이 남긴 ‘분재기(分財記)’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분재기는 조선 시대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상속해준 기록이다. 요즘의 재산 상속서라고 보면 될 것이다. 송순의 분재기를 보면 그는 장녀에게 노비 41명과 전답 1백53두락을, 차남의 부인에게 노비 40명과 전답 1백42두락과 유명한 정자인 면앙정, 주위 죽림 등을 상속해 주는 등 8명의 자손들에게 약 2천석을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면 남녀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상속해 주던 당시의 상속 관행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런 상속 관행이 아니라 그 재산 규모가 “나 한간 달 한 간 청풍 한 간”에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는 읊조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 경치 좋은 명승지에 지은 정자, 끝없이 펼쳐진 논밭에 달라붙어 개미처럼 일하는 수많은 자신의 전호(田戶 소작농)들과 노비들의 모습은 애써 외면한 채 자신은 십년을 노력해야 초가삼간을 지을 수 있는 청빈한 선비라는 공상 속에서 이 시조를 읊은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모순의 극치이자 자기 기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이 표방한 이상(안빈낙도)과 실제의 생활 모습(양반 대지주)이 달랐던 사대부들의 이런 현상이 조선 당쟁이 격화된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당쟁의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경제적 이익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송순이 경상, 전라감사,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양반 관료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송순이 막대한 재산을 형성하거나 또는 최소한 물려받은 재산을 유지하는 데 그의 관직은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관직과 재산은 대부분 비례하는 함수관계에 있었다. 결국 조선 시대 당쟁이 격화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돈’이었던 것이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이덕일 p447-448


 

조선시대에 회자된 안빈낙도라는 삶의 형태도 사실은 가진 자의 여유일 뿐 절대빈곤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선비들은 술자리에서 시조를 읊으며 안빈낙도를 중얼거리면서 왜 토지소유의 불균형이나 반상의 차별, 소작제도의 불합리성 등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소작료로 수확량의 반을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으면서, 또한 노비들의 고된 노동력을 통해 자신은 도식(徒食)하면서 입으로만 읊조린 안빈낙도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 부유한 지주였다. 어마어마한 갑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특히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경제활동에서 필수불가결한 두 핵심인 토지(생산수단)와 노비(노동력)를 소유함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재화를 쌓는 자들이었다.

 

영남 사림의 종장(宗匠)의 위치에 오른 김종직은 선산과 밀양과 금산 일대에 전답을 보유했으며, 소유한 노비는 그 전답에 따라 사는 외거노비를 제외하고도 뜰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다. 김일손의 전택과 노비도 경향 각지에 분포했는데 가는 곳마다 큰돈을 들여 정사(精舍)와 누정(樓亭)을 세울 정도로 공고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선비라 할 수 있는 이황도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으며, 예안 봉화 영천 의령 풍산 등지에 걸쳐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답을 보유했다. 마지기는 면적 자체보다는 수확량에 따른 기준이라 그 넓이를 일률적으로 가름할 수는 없으나, 논 한 마지기가 대략 150-300평, 밭 한 마지기가 대략 100-400평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의 면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이황은 논과 밭 각각 17만평 이상, 도합 34만평 이상을 보유한 셈이다. 그는 굳이 벼슬을 하면서 국가의 봉급을 받을 필요조차 없는 부호였다.

 

청빈이니 안빈낙도니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런 재력가들이 읊조린 빈(貧)의 의미는 막강한 재력이 받쳐주는 ‘이상한 가난’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자기 스승인 김종직의 삶을 가빈무복예(家貧無僕隸), 곧 ‘집이 가난하고 노복도 없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가난은 스승에게 예의를 갖춘 표현일 뿐으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자칭 타칭 선비들이 권력을 잡은 조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가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선비들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상업을 천시하고 억제하고, 도로를 뚫고 수레를 이용하고 선박을 통해 무역을 장려하자는 주장을 다 물리친 선비들에게 과연 책임이 없겠는가 말이다. 심지어 개인 덕목으로 중시한 청빈과 안빈조차도 절대빈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가진 자의 유유자적이었을 뿐이니, 자기 집안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해 여유로우면서도 나라는 항상 가난하게 방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가로서 본연의 임무를 방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계승범 p66-70


예학(禮學)으로 이름 높은 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방납과 고리대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말썽을 일으켰고 교동도의 고언백高彦伯(?-1609)은 자신의 집에 부역을 부과했다고 현감을 구타했다.

 

이 글은 <조선 지식인의 위선> 김연수 p323에 나오는데 이 책의 문제점이 각 기술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책 뒷부분에 참고문헌으로 수십 권 책 제목과 저자만 나열해 놓았기 때문에 어느 책에서 인용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고언백의 경우는 제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저 부분을 확인했지만 김장생의 경우는 아직 어느 기록에서 인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김장생이 방납과 고리대로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분은 꼭 답글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출처:parizal.egloos.com

 


 

게을러서 지닌 것 없이 가난한 사람이

자존심만은 뾰족해서
전가의 보도 휘드르듯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다. 

 

 

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아 꽁꽁 감춰두고

다락방 곳감 빼먹듯 숨어 살면서

도둑이 들까 걱정돼 거지를 자처하는 말이기도하다.

 

 

물론 정답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두 경우를 보았기에 심술이 솟아 한 말이다.
도연명이라는 사람이 정답 같은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데
까마득한 옛날의 사람이라 잘모른다.
아니 오늘을 살면서 진정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그 실체를 잘모른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막연히 짐작을 해본다.

 

 

가난도 가난 나름이다.
입벌리고 감떨어지기를 기다린다거나
백수로 지내며 쐬주 사먹고 남은 돈으로 로또 사서
일주일 기다리고 그리고 또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
남들은 하루도 바쁜데 일주일을 하루처럼 보낸다.
그러면서 떠벌린다. 가난하니 심신이 편안하단다.

 

 

가난에는 청렴이라는 말이 따라야 그 멋을 더한다.
가난에는 분수라는 말이 따라야 걸맞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모으며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분수를 지켜 편안히 산다고 자타가 공인할 때
안빈낙도를 입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하던 시절, 아니면 사업하던 시절, 아니면 공직에 있던 시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것을 세상이 다아는데
잊을만 했을 때 언론에 눈에 띄거나 아니면
스스로 나타나 초가집을 가리키며 안빈낙도란다.
개도 웃을 일이다.


역시 여기에도 똑같이 청렴이라는 말과
분수라는 말이 따라야 그 멋을 더한다.

"돈은 돌고 돌다 잠시 나에게 머물뿐"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깨닫고
"돈 세탁"안해도 깨끗한 돈을 지니고 있어서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가진것 세상으로 돌리고

도둑 걱정없이 편안히 산다.

 

 

진정 안빈낙도란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분수를 지킬 수 있는 여유,
삶이 편안한 그런 삶이 아닐까. 

 

 

그러면 나는?

 

 

첫번째 말한 자존심만 뾰족한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감나무 밑에서 입벌리고 있지는 않지만
로또를 사서 일주일을 기다리지 않지만
역시 자존심 땜에 남의 눈에 띌까봐
골방 깊숙한 곳에서 가난을 탓하며
그래도 분수와 염치를 지키자고

가슴을 죄뜯는 편안치 않은 사람-.

 

                                                               출처:

http://cafe.daum.net/callipiahttp://cafe.daum.net/calli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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