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海金氏 三賢派 諱永得 後孫 宗會
金海金氏(김해김씨) 시 조:김수로(金首露) 집성촌:경남 김해군 생림면 생철리 본관및 시조의 유래(本貫 始祖 由來) 가락국 전지(駕洛國傳誌)에 의하면 서기 42년(중국한나라 광무황제18)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들이 수빈(水濱:바닷물이나 강물등의 가장자리)에서 놀다가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나라를 다스릴 군장(君長)을 얻고자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빛이 내려와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들어 있었고, 다음날 그알속에서 여섯동자(童子)가 나왔다.그중 제일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 이름짓고 금합(金盒)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를 김(金)으로 하여 가락국(駕洛國)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 (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이다. 가락국(駕洛國)은 오랜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명(地名)도 여러 가지로 변해왔느데 금주(金州),금녕부(金寧府),금주목(金州牧)등으로 부르다가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때 금해부(金海府)가 설치됨으로써 수로(首露)의 후손들은 본관을 김해로 하게 된 것이다. 수로왕(首露王)이 즉위(卽位)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王統)을 잇고 두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姓) 허씨(許氏)인 태인허씨(泰仁許氏)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아들은 불가(佛家)에 귀화(歸化)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또한 허씨(許氏)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있으며 세 성씨(姓氏)가 다 같은 혈족(血族)이라며 종친회(宗親會)도 "가락 종친회(駕洛 宗親會)"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의 12세손인 휘 유신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駕洛國)마지막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자이며 무열왕(武烈王)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 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구형왕의 막내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當代)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어머니는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해김씨의 세계(世系)는 가락국(駕洛國 ) 태조왕을 시조(始祖)로 하고 수로왕의 12세손 흥무왕 휘(諱) 유신(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며, 유신공에 이르러 세계(世系)가 매우 번창하기 시작하여 대충 현재 148문파(門派),410여만명의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일 거대 명문이다. 그중에서 유신의 직계종파는 고려때의 목경(牧卿)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경파(京派:영견·영서·영정·영순)와 그의 아우 익경(益卿)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사군파(四君派:극조·완·여수·세기)와 관(管)을 일세조로 하는삼현파 (三賢派:극일·일손·대유)가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다. |
김해김씨 삼현파 유래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 - 극일, 일손, 대유)는 문정공(文貞公) 휘김관(管)을 중시조로 하며,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의 별칭이며, 이는 중조(中祖) 휘관(管)할아버지께서 조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라는 벼슬을 하셨기 때문에 그이하 자손들을 그렇게 불렀다. 중시조 휘 관할아버지는 태조왕 48世孫이시고 판도판서(版圖判書)라 함은 판도사(版圖司)의 최고 수장(首長)의 직위로, 당시 원나라(몽고족)에 의해 강제로 격하(格下)되었던 호부(戶部)를 말합니다. 즉,고려朝 전통의 호부상서(戶部尙書)이며 조선조(朝鮮朝)에 비하면 호조판서에 해당이 되는 정2품 당상관(當相官)으로 요즘에는 각부 長官과 그 官位가 같습니다. 문파(門派) 4세손(世孫) 휘(諱) 극일공(克一公)의 6兄弟로부터 군수공파(諱 建), 집의공파(諱 孟), 한림공파(諱 勇),진사공파(諱 順), 녹사공파(諱 靭), 진의공파(諱 鉉)등 6개 세파로 크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조선 정종조에 김해김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하였고 절효공 휘극일(節孝公 諱克一), 탁영공 휘일손(濯纓公 諱馹孫), 삼족당 휘대유(三足堂 諱大有) 등 三人을 가리켜 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하였으며, 집안에서 4대(四代)에 걸쳐 3賢人이 났다는 것은 고래(古來)로 매우 드문 일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후손(後孫)들을 삼현파(三賢派)라 불렀다. 현종(顯宗) 원년(1660년)에 나라로부터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사액(賜額:임금이 사당,서원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세긴 액자를 내리는일)받았고,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의 위폐를 서원 존덕사(書院 尊德祠)에 봉안(奉安)하고 유림(儒林)에서 누세춘추(累世春秋) 매년 2월 8일中 정일(丁日)로 봉향하고 있고 이 자계서원 건물(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번지)이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파조(派祖)및삼현(三賢)의 행력(行歷) 派祖 문정공(文貞公)휘管(1250년~1348년) 태조왕의 48세손(世孫)으로 삼현파(三賢派)의 파조(派祖)입니다. 아버지 휘 용직(諱 龍直), 어머니 함양박씨(咸陽朴氏)의 독자(獨子)로 경술년(서기 1250년) 5월 5일 무인에 生하시니, 자는희범(希範)이며, 호는 정성헌(靖醒軒), 시호(諡號)가 文貞(문정)입니다. 병인년(서기 1266년)에 현량과 삼장(三場)에 오르니. 처음 교서랑(정9품직)에서 한림원으로 옮겼는데 먼저 소임을 받았던 안유(안향)가 공의 단아함을 보고 교유하니,경전(經典)과 고금치란(古今治亂: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림)에 밝아 국가의 큰 재목이라 하여 일컬었습니다.기사년(己巳年)(서기력 1269년) 원종(元宗)조에 적신 임현 부자등이 왕을 폐하는 사건이 나자 홍문계, 소송예등과 함께 잡아서 단죄하여 원종이 복위됨에 일조하였고, 삼별초의 난에 한림 안유가 적진의 꾐에 빠지자 공이 그를 깨닫게 하여 순역의 의리로 달래어 돌아오게 하니 왕이 안유에 대하여 칭상(稱賞)하려함에 안유가 적진에서 탈출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정성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이를 사양을 하자, 왕이 더불어 공에게도 더욱 중상(重賞)을 하고 태상에게 명하여 "管"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정축년(서기력 1277)에 판도사좌랑(정6품)에 배했다가 감찰어사(종6품직)로 옮기고 국자사업에 올라 안유와 함께 그 직을 수행하면서 국법을 바로잡음에, 권력에 의존하는 세력들이 감히 기를 펴지 못하니 왕이 공을 더욱 중히 여겨 병풍 두자리를 내리고 동리 이름을 어병이라 하였습니다.기축년 (서기력 1289) 10월에 충선왕이 원에 입조할때 - (고려사에는 "기축년 11월 임자에 왕이 공주, 세자, 인후,염승익, 안향등과 합께 원에 입조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왕을 수행하여 연경에 머물며 "주자전서"를 필사하고 이듬해 3월에 돌아오니 왕이 밀직사사(종2품직)를 배하였습니다. 신축년(서기력 1301년) 5월에 궁궐에 큰불이 나자 화염속에서 왕을 구하려 하자 하늘에서 큰 비로써 왕을 구하게 하였고, 국학이 미비함에 안중찬과 더불어 궁전출납과 노비제도, 사역의 법칙을 정해 백관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전각을 세워 성인의 영정을 모시니 왕이 직접 배알하였습니다. 기묘년(서기력 1339년)에 왕이 원나라에서 죽으니 왕을 대신하여 유치되기를 자청, 원이 공의 충정에 탄복하여 놓아주고 친히 왕의 상여를 운구하여 고려로 돌아오니 그 충의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을유년 (서기력 1345년)에 충목왕이 판도판서(정3품직)에 국자사업을 배하고 궤장, 약물, 의복을 하사하였으나 연로에 과애함이 병이 되어 2월 9일에 향수 96세에 졸하시니, 왕이 이를 듣고 매우 슬퍼하며 이인복에게 명하여시호를 내리고 김해군 대산면 저소산에 예장하게 하였으니. 지금의 창원군 대산면 유등리 저소산 신좌(辛坐)입니다. 배위는 정부인 나주임씨(貞夫人 羅州林氏)이니 대사성 임충의 여식으로 공보다 먼저 갑인년(서기력 1314년) 10월 2일에 졸하였으나 묘는 공과 합장되었습니다. 위 파조 휘관의 행장은 선도비문의 내용을 편집한 것이나, 문내용이 역사적 시기와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그러나 줄기는 다른 기록에도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절효공(휘 극일) 삼현중의 제일인(第1人)으로 아버지 휘서(諱 胥:의흥현감-종6품직),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장자(長子)로 고려 우왕 8년(서기 1382년) 2월 8일 청도군 이서면 삼성산하 와룡등 운계리에서 생(生)하시어, 자는용협(用協)이며, 호는모암(募庵), 시호(諡號)가 절효(節孝)입니다.일찍이 야은 길재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을 하여 문장(文章)에 능통하고 학문이 매우 깊었습니다. 아버지 휘서(諱胥)의 꿈에 주자(朱子)가 현몽(現夢)하여 이르기를 소학(小學) 한 권을 주면서 아들이 태어나 이 책을 읽고 깨달으면 반드시 출천지 효자(出天地 孝子)가 될 것이다 하고 사라지매, 이날로 태기가 있어 14개월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0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가 종기를 얻어 화농하였는데 입으로 농혈(膿血)을 빨아내어 낫게 하였고,아버지가 첩실을 두니 어머니가 화를 내시며 식사를 하지 아니함이 여러번이나 번번히 직접 밥상을 날라 드실 때까지 기다려 다 드신후 비로소 식음하였으며, 가무와 술을 즐겨하시는 아버지를 위하여 직접 음식을 준비하여 들고 찾아가기를 수없이 반복함에도 괴로운 표정을 짓지 아니하다, 나이 30여세에 아버지 또한 설리를 앓아 위중할 때 혈분(血糞)을 맛보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낫게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당상(當喪)에 30리나 떨어진 묘소에 여막을 짓고 조석(朝夕)으로 잔을 올린 후 짚신의 도보로 아버지 처소에 문안올림을 눈비에도 거르지 아니하며 3년의 시묘를 하였습니다. 곧 경자(更子)에 아버지 또한 喪을 당하니 어머니묘 옆에 장사하고 다시 시묘 3년을 하는데 하루는 큰 범이 묘를 떠나지 않아 제물을 나누어 먹이면 갔다가 오기를 반복함에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출천지효(出天之孝)에 감천(感天)하여 절효공이 시묘 6년을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범이 끄니 따라가 멈추는 곳이 있어 범의 보은(報恩)이라 여겨 사후 묘소로 정했는데 이름하여 호점혈(虎占穴)의 명당입니다. 부모당상(父母 當裳)후, 평소 아버지 앉아 있던 자리는 절대 앉지 아니하고, 두 서모(庶母) 모시기를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정성으로 모시니, 세종조에 나라에서 출간한 삼강행실도에도 그 내용이 실릴 정도입니다. 일찍부터 벼슬에는 큰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을 하면서 조부모와 부모를 정성으로 봉양을 하였는데, 그 봉양을 위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들과 손자들의 교육까지 직접 맡아 손자(孫子)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당대의 문장으로 과거에 올라 "김씨 삼주(金氏三住)"라는 호칭을 듣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통덕랑(通德郞:5품 관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5품관직)을 지내고 향리(鄕里)에서 6형제의 교육은 물론 후학(後學)들의 계도에 힘써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문장과 학문이 매우 깊어 그를 따르는 자가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 세조 2년(서기 1456년)에 졸(卒)하시니 향수(享壽) 75세입니다. 집의(執義:종3품직)가 증직(贈職)되고, 생전의 출천지효(出天之孝)를 칭송하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유림과 제자들이 시호(諡號)를 절효(節孝)라 하였으며, 세종때 청도군수 이기의 보고에 따라 효자정려(孝子旌閭)가 세워지고 1482년(성종 13년)에는 김종직이 찬한 효자문비가 건립되었으며, 1615년(광해군 7년)에 일손(馹孫)이 제향되어 있는 청도군 이서면 서원동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봉안하고 향사하였습니다. 묘소는 청도군 각북면 명대리 나복산 호점혈(虎占穴) 인좌(寅坐)이며, 배위는 한성부윤 간(간)의 딸 숙인(淑人) 이씨(李氏)이니 묘소는 부군과 나란합니다.슬하에 아들 6형제를 두었으니, 곧 장자(長子)는 영광군수를 지낸 휘건(諱 建)이요, 차자(次子)는 증 이조참판 휘맹(諱 孟)이며, 삼자(三子)는 한림을 지낸 휘용(諱 勇), 사자(四 子)는 진사 휘순(諱 順), 오자(五子)는 양현고 녹사직을 지낸 휘인(諱 靭), 육자(六子)가 진의부의도총관을 역임 한 휘현(諱 鉉)입니다. ▼참조 집의 -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를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소속의 제2관원. 사헌부 관원은 대사성(종2품) 1인, 집의 2인,장령(정4품), 지평(정5품), 감찰(정6품)등으로 구성되었다. 양현고 -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을 공급하던 기관 (녹사 : 조선시대 8-9품의 행정실무를 맡아보던 하급관리) 한림 - 예문관(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관청- 고려시대에는 한림원)의 봉교(정7품), 대교(정8품), 검열(정9품) 을 말함이며,춘추관의 기사관이 겸직하므로 사관 또는 한림이라 하는데, 문장이 뛰어나고 청렴한 자 를 선발하여 수행하게 했다. 진의부위 - 무관직(武官職)의 8-9품직을 위하여 설치된 관청. 부사용, 선전관, 수문장, 초관, 척후장, 별장, 권관등이 있었다. 처의 칙명은 유인이라 한다. 부사용은 5위중의 최하위 말단으로 미보직 문관, 무관, 음관으로 임용하였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녹봉만 받았다. 탁영공(휘 일손) 삼현파(三賢派)의 제2인(第2人)이며 아버지 휘맹(諱 孟:사헌부 집의), 어머니 용인이씨의 삼자(三子)로 세조 10년(서기 1464년)에 청도 운계리(지금의 서원동)에서 생(生)하시어, 자는계운(溪雲)이며, 호는탁영(濯纓)입니다, 출생당시 앞내에 서기가 무지개와 같이 오랫동안 있었다고 하며, 천성(天性)이 총명하여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동문인 김굉필, 정여창과 親交가 있었습니다.. 성종 17년(서기1486)년에 생원(生員)이 되어 같은 해 8월에는 식년문과 갑과(甲科)로 장원급제를 하고, 그해 10월에 다시 알성대과(謁聖大科)에 장원급제를 하는 수재(首材)였습니다. 시관(試官)이었던 서거정의 추천으로 홍문관, 예문관등의 청환직(淸宦織)을 거쳐 1488년에는 왕의 특혜로 대과(大科) 급제자(及第者)의 문신(文臣)들만 들어갈 수 있는 조선조 최고 학당인 호당(湖當)에서 수학(修學)을 하였고, 이조정랑(吏曹正郞:정5품관)을 거쳐 1490년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 다음해(28세)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외교사신으로 다녀왔습니다. 이때에 명나라 명현(名賢) 정유, 주전등과 교결하여 칭송을 받았습니다.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정7품관 이하)시절 당시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의 비행(非行)을 사초(史草)에 직필하고, 또한 이극돈과 성준이 붕당(朋黨)을 획책한다는 상고(上告)를 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극돈과 성준 등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결정적인 원인(原因)중의 하나가 됩니다.연산군 즉위 4년후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시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사국(史局) 당상관(當相官)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탁영공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意祭文)과, 이극돈 자신의 비리(非理)가 적힌 사초(史草) 내용을 발견하고, 자신의 비리가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탁영공께 내용삭제를 간청(懇請)하자 탁영공께서는 목숨을 다해도 뺄 수가 없다고 거절(拒絶)하게 됩니다. 자기들의 비행이 탄로날 것을 염려한 이극돈을 비롯한 당시 훈구파들은 유자광을 시켜 연산군에게 사초가 왜곡되었다고 충동을 하고 세조에게 불충한 무리로 몰아 탄핵할 것을 고하자,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이 대노(大怒)하여 많은 신하들을 국문(國問)하니, 드디어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이로써 일어나게 됩니다. 스승 점필재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탁영공께서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게 되니 향년(享年) 35세였습니다.처형(處刑)을 당하던 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폭풍우가 거세게 일어났으며, 고향인 청도(淸道) 운계천(雲溪川)에 3일 동안 붉은 물이 흘렀다고 하여 세인(世人)들은 탁영공의 충절(忠節)과 기개(氣槪)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합니다. 이때에 이른바 무오사화의 5賢이라 일컬어지는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이 함께 참형을 당하고, 김굉필, 정여창,박한주등 많은 대신들이 유배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진 영남학파가 거세되는 역사적인 큰 사건이었습니다. 성종 25년에 단종의 후사(後嗣)와 소릉(昭陵:단종어머니 현덕왕후의 릉)의 복위(復位)를 상소(上訴)하였고, 연산군 2년에 충청도사(忠淸都事) 재직시에는 왕의 난정(亂政)과 간신들의 부정부패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학문과 충절의 선비였습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후 신원(伸寃:억울한 죄를 풀어버림)되어 복작(復爵)하고 도승지와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순조 30년(서기 1830년)에 왕이 문위(文愍)의 시호와 자계서원에 사액을 내려 당시 도승지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습니다. 한편 중종조에 도학(道學)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 일파에 반하여 한문학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사장파(詞章派:조선 시대, 문장과 시부를 중요시하던 한 학파)의 대표인물로도 모셔지고 있습니다. 남원의 사동서원, 함양의 청계서원, 청도의 자계서원등 여러곳에 봉안되어 있고, 공의 유물은 무오사화때에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벼루와 유묵(遺墨) 몇장, 교지(敎旨)등이 종가(宗家)에 가보(家寶)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묘소(墓所)는 3번을 이장한 끝에 청도군 이서면 수리리 수야산에 위치하며,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단양우씨, 정부인(貞夫人) 예안김씨입니다. 공(公)이 후사(後嗣)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자 정부인(貞夫人) 예안김씨는 문중의 뜻에 따라 문중회의에서 백형(伯兄) 준손(駿孫)의 차자(次子) 휘 대장(諱 大奬)으로 하여금 그 후사(後嗣)를 잇게 하였습니다. ▼참조 質正官 - 사신으로 가는 임시직, 특정사안에 대한 물음으로 중국에 가서 답을 가지고 오기 위한 목적으로 정기사행시에 동행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書狀官 -정기적으로 중국사신으로 가는 사신중의 1인 기록을 맡아보던 문관으로 정사,부사와 함께 3사라함. 삼족당공(휘 대유) 삼현의 제삼인(第3人)이며 아버지 휘 준손(駿孫:직제학-정3품관),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의 장자(長子)로 선종 원년(서기 1479년)에 생(生)하시어, 자는천우(千佑)이며, 호는 삼족당(三足堂)입니다. 김종직의 문하생이었던 정여창의 문인으로 수학을 하였고,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로 숙부이신 탁영공이 화를 당하게 되자,아버지 휘 준손(諱 駿孫)과, 형제들과 함께 전라도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1년(서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은사를 받아 적소에서 풀려납니다. 다음해인 중종 2년에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고향에 돌아와 인재양성(人才養成)에 힘쓰고 있는 도중에 중종10년(서기 1515년)성균관 유생들과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전생서(典牲署) 직장(直長:정7품직)을 지내다가, 중종14년에 현량과(賢良科)의 병과로 올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정6품직)에 오르고, 호조좌랑(戶曹佐郞:종6품직)겸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거쳐,정언(正言:정6품직)이 되었으나 곧바로, 칠원현감으로 부임하여 부임 3달만에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들로부터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중종 19년)가 일어나 현량과가 폐지되자 직(職)을 사임하고 청도 운문산에 은거, 소요당 박하담과 함께 동창(東創)을 건립하고 휼민사업(恤民事業:가난한사람이나 재해를입은사람을 도와주는일)을 이끌게 됩니다. 이 시기에, 더불어 공(公)은 조식, 박하담, 주세붕, 김응조, 신계승등 영남의 문인들과 친교를 하여 강론을 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후, 인종 1년(서기 1545년)에 인종의 유명(遺命)으로 현량과가 복과(復科)되고 왕의 명에 의하여 상경(上京)을 하게 되는데, 이미 벼슬에 뜻을 버린지 오래라 상경도중 병(病)을 핑계로 그 뜻을 고(告)하고 다시 향리에 은거하여 휼민사업(恤民事業)과 인재양성에 힘을 쓰시다가 명종 7년(서기 1552년) 2월에 졸(卒)하시니 향수(享壽) 74세입니다.현종조에 왕명(王命)으로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종4품관)에 증직되고, 저서에 탁영년보가 있으며, 손수 건립했다는 삼족당이란 정자가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에 지방문화재로써 보존되고 있습니다.자호(自號)인 삼족당은 계산(溪山)이 足하고, 풍월(風月)이 足하며,음아(吟哦 )에 足하다 하여 三足堂이라 하였다고 합니다.三賢人 모두 현재 청도군 이서면 서원동의 자계서원에 배향되어 향사되고 있으며. 묘소는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금곡산, 배위는 숙인(淑人) 벽진이씨입니다. ▼참조 현량과 - 조선중종14년(서기 1519년) 조광조의 건의로 실시된 관리등용제도의 하나로, 현량방정과의 줄임말로 일명 천거과라 한다. 조광조는 과거제가 문장의 수려함에만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고 중국 한나라의 현량방정과를 본따서 대책으로 시험을 보아 인재를 등용하도록 건의하여 ,성균관, 교서원,홍문관, 예문관, 중추부, 한성부, 6조등과 지방에서 천거한 인재 120명을 근정전에서 시험을 보아 28명을 뽑 았는데, 이제도를 통하여 신진 사림파들이 대거 등용됨에 따라서, 기존 훈구파들에 의하여 지탄의 대 상이 되기도 하였고, 기묘사회로 조광조가 제거되자 한때 폐지되었다가 후에 복과되었다.자료출처 : 가락왕손 총람 ♣경파와 향파 조선조에 편찬된 초기 삼현파 족보에는 휘 상주祖께서 방직과 용직 등, 두 아들을 얻음을 계기로 휘 용직(諱 龍直)을 파조(派祖)로 삼아서 그의 초휘(初諱)인 용각(龍角)을 본따 "용각파(龍角派)"라 하였습니다만 이후의 족보에는 그의 아들 휘 관이 고려조에 고관을 지내고 많은 업적을 쌓음에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파조를 변경한 듯 하다. 삼현파는 절효공의 次子 남계공 휘 맹의 세아들중 조선 성종조에 장자 준손과 차자 기손이 먼저 동시에 대과에 응시하여 각각 차장원과 장원으로 급제하자 성종임금이 기특히 여겨 어버이를 빛나게 하였다 하여 크게 칭찬을 하더니, 그 뒤 삼자 일손이 2종류 대과에 연거푸 장원으로 급제를 하자 세아들에 의하여 어버이의 이름이 세상에 더욱더 빛나게 하였다 하여 칭찬하고 "청도삼주(淸道三柱)"라 불러 세인들은 이들을 두고 "金海(또는 金氏)三柱"라 하며우러러 보았습니다. 절효공의 6형제에 이르러 가세가 크게 번창하더니 문민공 휘 일손(諱 馹孫)께서 무오사화에 연루됨에 따라 그 화가 모두에게 미치어 삼남각지로 유배를 당하는데 이때부터 삼현파가 향파(鄕派)의 대표격으로서 청도지방을 중심으로하는 경상도와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에서 그 가세가 번창을 하여 전국 각지로 후손이 흩어져 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경기도와 한성을 주된 주거지로 하여 주로 중앙직에 진출을 했던 김녕군의 후손들을 일러 경파(京派)라 하는 반면, 문파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탁영공의 무오년 사화에 연루되어 대부분 연좌되어 오랫동안 삼남 각지로 흩어져 유배를 당함에 중앙의 고급관료에는 비교적 인연이 멀었던 우리 삼현파를 일러 향파(鄕派)라 불리우고 있으니, 그리하여 삼현의 후손들은 중앙관료로 一身의 입신출세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되 대체적으로 학문으로써 사회를 교화시키고, 백성들과 동거를 함에 고급관료로써 이름을 남긴 조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으나 삼남의 여러 곳에서 그곳의 지도자로써, 또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로써, 일부는 중인으로써 예와 기에도 능한 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
金海金氏 三賢派 諱永得 後孫 宗會 약사(略史) 본 종회(宗會)는 西紀42年 가락국의 태조왕인 김수로(金首露)왕이 제1세 시조(始祖)이며,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신 휘유신을 거쳐 始祖49世 휘관(管) 할아버지가 中始祖이고,中始祖 6世인 절효공(節孝公) 휘(諱)극일(克一)할아버지의 차자(次子)인 집의공 휘맹(孟)의 3子인 문민공(文愍公) 휘일손(馹孫)이 무오사화로 요절(夭折)하시자 후손이 없어 長子인 휘준손(駿孫)의 차자(次子)인 휘대장(大壯)을 계자(系子)로 대를 이었다.중시조(中始祖) 8세(世)인 현감공 휘대장(大壯)께서 남원 현감으로 제임후 은퇴하고 남원에 다니려 가셨다가 그곳에서 56세의 나이로 별세 하시니 맏이인 휘갱(鏗)은 후손이없고 차자(次子)인 휘장(鏘)이 부친의 산소를 지키기 위해 남원(南原)에 거처를 정하고 청도(淸道)를 오가며 그곳에서 후손들이 세거(世居:한고장에서 대대로 삶)하였다. 그후 휘장(鏘)의 5子인 진사공 휘치성(致星)(묘:남원)의 아들 중시조11세 입향조(入鄕祖)이신 모월당(慕月堂) 휘양경(良慶)이 모친 평산신씨와 김천 농소 봉곡으로 이주 정착하여 아버지 휘치성에 이어 봉곡2대가 되었다. 봉곡 2대조 휘양경(良慶)(慕月堂,묘:봉곡), 3대 정일(挺逸)(묘:봉곡),4대 휘무생(武生)(묘:금산 연명)를 거처 봉곡5대엔 휘영걸(永傑,봉곡),휘 영숙(永淑,성주),휘영득(永得,아포,선산), 휘영보(永保,신촌)4형제가 흩어저 살았다. 그중 3남인 始祖62世 봉곡5대이신 휘영득(永得) 할아버지가 牙浦로 이주 정착하여, 현재 牙浦와 善山을 중심으로해서 후손이 번성하여 전국각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先塋은 김천시농소면 봉곡리(속명:샙띠),남면부상리(속명:사모실), 아포읍 봉산리(속명:작동뒷산.새각금),아포읍 대신(속명:시네이 큰골) 남면 오봉리 등등에 散在되어 있었으나, 제3공화국시절인 1968년경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아포 봉산리 先塋이 도로부지로 수용되어 이장이 불가피하게 됨에따라 이것을 기화로 남면 오봉리 산32번지에 합동묘역를 조성 이장하여 한곳에 모시게 되었으며, 2010년12월8일 봉곡 샙띠(봉곡5대조 永得 합묘) 및 남면 사모실 (봉곡6代祖 諱萬直, 참고: 6代祖母는 오봉동에 먼저 이장되었음)선영이 최종 이장됨에따라 휘영득(永得) 후손 묘역정비사업이 완결 되었음. 휘영득(永得) 후손의 선영에대한 제향(祭享) 및 묘소의 유지관리를 위하여 종원명의로 명의신탁된 종산 및 종답(별지 참조)이 있어나, 2011년 1월현재 대부분 묘답으로의 기능이 사라짐에 따라 명의신탁처리되어 있는 재산에 대하여 휘영득(永得) 후손의 본 종회 명의로의 실질귀속등 종합 정비작업중에 있음. |
김해김씨 제실
음력 10월16일 농소면 봉곡(샙띠) 람덕제(覽德齊) 제향(祭亨)후 그주 일요일날 시행하며 종회는 묘제후 정오에 실시한다. 行列表(항렬표) 版圖判書公諱 管派(판도판서공휘관파)(삼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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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 부동산 현황 2010.12현재 | ||||||
NO | 소재 지번 | 지목 | 면적 | 등기일자 | 명의인 (차명인) | 비고 |
1 |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 1418 | 답 | 898 (271평) |
31.4.12 (71.2.23) |
김기배 김시동.김필원 김만성 | |
2 | 김천시 아포읍 봉산리1079 | 전 | 13,603 (4,115) |
68.2.6 (81.8.17) |
김영수-김종원(07.11월이전) 김용갑-김창남(05.11월이전} 김양수 김태영-김정옥(92.7월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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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1502 | 답 | 1,564 ((479평) |
73.2.2 (81.8.17) |
김사호 .김원배.김광영 | |
4 | 김천시 남면 부상리 산71 | 임야 | 8,727 (2,640평) |
74.8.5 (85.6.29) |
김금룡,김창남,김영수 | |
5 | 김천시 남면 부상리 756 | 전 | 1,789 (541) |
74.8.5 (85.6.24) |
김금룡,김창남, 김영수 | |
6 | 김천시 남면 오봉리 1231 | 답 | 1,464 (443) |
82.11.8 (82.11.15) |
김원배,김사호,김성호 | |
7 | 김천시 남면 오봉리 산32 | 임야 | 18,875 (5,711) |
73.4.10 (85.2.8) |
김정일-김동석 (09.10이전) 김영수 김경배 김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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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김천시 남면 오봉리 산32-3 | 임야 | 1,304 (394) |
73.4.10 (85.2.8) |
김정일-김동석(09.10이전) 김영수 김경배 김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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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김천시 남면 오봉리 1271 | 전 | 1,454 (440) |
(85.2.25) | 김정일-김동석(09.10이전) 김영수 김경배 김광수 |
金海金氏 三賢派 諱永得 後孫 宗會 會 則 1조: 본 회는 김해김씨 삼현파 영자득자 후손 종회라 칭한다 2조:본 회는 조상을 숭상 공경하며 애족심을 돈독히 하고 종친상호간 상부상조하며 종중재산의보존및 취득관리함을 목적으로 한다. 3조:본 회의 사무실은 김천시 아포읍 봉산리651-1에 둔다 4조:본 회의 회원은 김해김씨 삼현파 영자득자 후손중 20세 이상 성인남자로 한다. 단 회원의 사망시는 그후손이 승계 한다. 5조:본 회의 회무를 담당 집행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임원 을 두기로 한다. (1)회장1명 (2)총무1명 (3)감사1명 6조:본 회의 임원은 총회에서 선출하고 그임기는 2년으로 한다. 단,1회에 한하여 중임할수 있고 보결시는 전임자의 잔여 임기기간으로 한다. 7조: 본 회는 정기총회와 임시총회로 구분 개최한다. (1)정기총회는 매년(음)11.15에 한다 (2)임시총회및임원회는 필요시 회장이 소집한다. 8조:총회는 다음사항을 의결한다 (1)종중 회칙 개정. (2)예산 및 결산 ,감사보고 승인 (3)임원선출 (4)기타 본회 운영에 관한 필요한 사항 9조:본 회의 의결 정족수는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한다. 단,가부 동수일 경우는 회장이 결정한다. 그리고 본 회의 회칙개정 및 종중재산등을 처분할 경우에는 회원 3분의2의 출석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10조:본 임원회는 다음 각항을 집행한다. (1)종중회의 운영에 관한 사항 (2)종족,종친간의 침목화 화합에 관한 사항 (3)선친의 분묘관리에 관한 사항 (4)종중재산의 보수 관리운영에 관한사항 (5)부의사항및 기타필요한 사항 11조:본회의 재정은 다음 (1)종중 재산의 경영 수익금 (2)종중회원의 성금및 찬조금 (3)기타 수입금 12조:본 종중의 회칙은 1948년 1월1일부터 시행한다. |
영자득자 후손종친회 연락망 제1조 (한규가계):시조66대 조장:광선 ☎ 연락책:진희 ☎ 덕봉(진희·준희),덕준(돈희·영희),윤준(창희·종희·종규·종오) 광선(문희,욱희,종훈),상선(종혁·종현),옥두(종경) 제2조 (억규 가계) 조장: ☎ 연락책:준호 ☎ 상문(병옥· 정일 ·재기· 재일), 상두(병화·황수),상응(태훈) 희종(기승,판영), 상수(준호·맹호·달호·장호) 희중(대호·도연·용진) 제3조 (구억 가계) 조장및 연락책:종배 ☎ 종배(진영·대영),쌍배(재영·수영·도영)학곤 ,중곤 제4조 (구천 가계) 조장및 연락책:수광 ☎ 계용(상호·상대),백곤(수광·광영·광식) 제5조 (구영 가계) 조장:양수 ☎ 연락책:길수 ☎ 무경(양수),성곤(창수·선수·후수),문경(길수·민수),한영(이수·종오), 계영(종현·종부·종태) 병원((광옥),무원(석화·석웅),봉원(석준·기태·석태), 영원(석만·석헌),백곤(광수·광한=진태·현태),상곤(용식,원수),옥곤(광식), 주곤(희수·종식),호곤(경수·종운),두영(종석·동우),태영(정옥·재원·수원·경수),일영,대영 제6조 (구식가계) 조 장:동수 ☎ 연락책:용수 ☎ 영수(종원·종태),인수(종윤·종현),용수(종도·종구),사호 (종회·종만), 동호(종근·종섭),동수(종복),윤수(종운),경호 제7조 (구수 가계) 조장:옥배☎ 연락책:천식☎ 창호,창록(종득),창배(대영),옥배(병준.상준·용이),옥철(세준),효곤(천식.종철·종덕) 칠성(종문·종락),태용(종근),상록(종범) 제8조 (구문가계) 조장:경배 ☎ 연락책:옥배 ☎ 금용(경배·옥배·원배),금석(형재·형배),금준(경일),금숙(경천·경덕), 금학(경진·성진),금국,금복((경희),금태(경식),일용(동배),해용(왕배·왕성·왕필), 하용(병춘·현춘),사용(현섭·현배) 제9조 (구철 가계) 조장및 연락책: 창남 ☎ 창선(종각·종덕),창남,창규,홍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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