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생애 초반
유년시절과 가정 배경 (1917 ~ 1920)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1978년~현재: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效力副尉)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 박씨 박성빈(朴成彬, 당시 46세)과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白南義, 당시 45세)의 5남 2녀 중 막내였다. 신라 경명왕의 왕자였던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言成)의 후손으로 조선 정조 때에 암행어사로 이름난 박문수는 그의 7대 방조였다.
태어날 당시 그의 위로는 박무희(19세), 박귀희(15세), 박상희(11세), 박한생(7세), 박재희(5세)가 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두 형 박동희와 박무희는 결혼하여 자녀가 있었고, 은씨 집안으로 시집간 큰누이 귀희는 임신 중이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1892년,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였고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하자 연좌되어 이후에는 외가의 선산인 상모동의 약 1600평짜리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여 상모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14]
어머니 백남의는 45세의 나이로 박정희를 임신하였기 때문에 박정희는 백남의에게 있어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누나인 박귀희에 의하면 당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있었던데다가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기,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넘어져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 등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 그리하여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낙태를 포기했다고 한다.[16] 그의 어머니는 맏딸 박귀희에게 임신사실을 비밀리에 말하였고 귀희는 어머니의 낙태를 돕기도 하였다.[16]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으나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노산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죽을 먹고 자랐으며, 큰누나 귀희의 젖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17] 또한 변비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16]
유년기 (1920 ~ 1926)

영아기에 박정희는 집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밑에 놓은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흙을 짓이겨서 갓난 아들에게 발라주었고,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16] 이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도 한다.[16]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18] 훗날 입학하는 구미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입되어 있으며[18]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18]
그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토지와 가산을 탕진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 박성빈과 형 박무희는 인근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소년 시절 (1926~1934)
박정희는 1926년 4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19]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17] 한편 그의 담임 선생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19] 반 학생들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 한다고 평하였다.[19]
수업시간에 박정희는 남보다 먼저 손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19]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겨했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 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며[20]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20]
소년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21]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22]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22]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박정희는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 사건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자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22] 한다. 1972년 이준상은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으나[22] 그는 53세에 사망했다.
1932년 3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19]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23]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선생들과 교장선생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이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합격하였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23]
교육 활동 (1932 ~ 1940)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23]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24]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24]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였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25]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는데[26]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고 주장하였다.[27][28]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27][28][29]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27][28]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30]
청년기
만주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 ~ 1942)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31일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하였다.[31][32]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33] 혈서로 쓴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미 만주국의 군관으로 합격한 상태였다. 이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본의 작은 지방지였던 만주신문의 허위보도일 가능성이 크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34]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5]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942 ~ 1944)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한다. 그리고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37]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이 시기 박정희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38]
만주군 복무 (1944 ~ 1945)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다.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군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39] 정설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의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되었다.[40][41][42] 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에도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43] 한편 박정희와 같이 만주 제8사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44]
군관시절 박정희는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45]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토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45]
한편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일본어: 岡本實)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46]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46]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47]《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혔다.[45][48]
일제 강점기 후반
또한 이때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태극기를 가르치다 발각되어 자신을 집단폭행하였던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49]
한편, 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은 만주분맹의 군사책임자였던 만주군 대위 박승환이 그 해 국치일인 8월 29일을 기점으로 국내 진공을 하기 위해 만주에 있던 조선 출신 군인들을 많이 포섭했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건국동맹과의 연계설’에 대해 한 연구에 따르면 '그가 해방 직후 봉천(선양)을 거쳐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베이징 쪽의 우회로를 택한 것을 보면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무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지적했다.[38] 당시 여러 정황에서 보면 박승환 쪽에서 그에게 접촉해왔을 개연성이 있지만 과연 박정희 자신은 그들 비밀결사에 가담했었는지는 불분명하다.[50][51] 이에 대해 오마이뉴스 에서는 관련 부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내용은 전부 날조된 것이며, 박정희가 독립군과 접촉하거나 그런 적이 없다고 보도하였다.[52]
박정희는 만주 보병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53]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54][55]
광복 직후
광복과 귀국 (1945 ~ 1946)
해방 이후 박정희는 한국 광복군에 입대하였는데 만주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 짓는 주장도 있다.[56]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비밀 선전문은 전 광복회장 김우전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에 연관된 듯 알려진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이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이 거짓임은 확인된 사실이다. 5·16 이후 반혁명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정희를 지하독립운동 리더로 묘사한 책을 쓰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1967년 박영만은 자신의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었다[57]는 설도 있다.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형 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58]
광복 직후(1946 ~ 1950)
1946년 5월 8일,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59]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60]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60]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면전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이피스트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60]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힌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과 동거를 했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사망했다.[61]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한국군 내의 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이었던 그는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프락치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정희는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62] 실형은 면하고 다음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63]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64]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중에 북한군이 38도선에 총집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바로 국방부에 보고서를 올렸으나 이승만 대통령 이하 당시 초대정부 구성원들은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사반란을 시도하지만 북한군과 전투상황이였기에 그의 상급자들이 박정희를 무마시켜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 앙금을 계속 갖고 있던 박정희는 그로부터 10년 후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1950 ~ 1959)
한국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광역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 김영기였다.[64]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 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65]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65][66]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67]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67],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67]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65]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65]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68]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68]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조치로 대기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69]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 때의 일로 박정희는 곽영주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품게 되었고,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69]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68]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68]
이승만 정권 말기에도 박정희는 정변계획을 세웠으나 1960년 5월 이승만이 자진 하야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 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69]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69]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하였다.[69]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68]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69]
5·16 군사정변
이 부분의 본문은 5·16 군사정변입니다.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70]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초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인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71]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71]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정변이 발생하자마자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범죄자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최무룡, 김지미등 연예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던 폭력배 임화수, 꿀돼지라는 이름으로 폭력배들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정식,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을 두둔한 책임을 지게 된 최인규, 그리고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데다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못된 짓을 저지르며 특히 4.19 혁명때 민간인에게 발포 명령을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한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는데 박정희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구악 일소, 즉 과거의 잘못된 점을 모두 없앤다는 명분하에 조리돌림을 실시한 후 이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72] 또한 정변 한 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73]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시켰다.[74]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74]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74]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75]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75]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76]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1961 ~ 1962)

국가재건최고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한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21]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50만환, 의친왕비(妃) 김씨에게는 30만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씨와 삼축당 귀인 김씨에게는 각각 10만환 등 모두 100만환을 지급하였다.[77]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 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78]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79]
1961년 11월에는 독도의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
한편 12월 학사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21]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 ~ 1963)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그 해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舊) 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사재를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21]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 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80] [81]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 전 대표만 결단을 내린다면 ‘자명(김지태의 호)·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82]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83]
1962년 12월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84]
통화개혁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85]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축재자들의 자금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86]
실제로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5000여 명의 화교가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 명만이 남아있다.[87]
제3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제3공화국입니다.
5대 대통령 후보자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하다.[88]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89] 김희덕(金熙德)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89]
같은 해 4월 8일에는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한다.[90]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 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과 허정, 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사상 검증 의혹
이후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있었고[91], 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한 바 있다.
선거 유세당시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李萬燮)을 비롯하여 민관식(閔寬植), 백남억 등이 참여하였다.[92] 대구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 고 하였다.[93]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한 바 있었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94]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그는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94]고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95]'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95]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96]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94]
10월 자유민주당의 김준연은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97]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간첩 황태성은 박정희씨의 친형인 박상희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씨는 대구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 때 박정희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97]
윤보선, 김준연 등의 사상 공세에 수세로 밀린 그는 한민당은 부패한 부자들과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집단이라며 맹비난을 가한다. 그는 윤보선, 김준연이 한민당 출신임을 강조하고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론으로 대응했다.
강원룡은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98]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71]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99],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98]
원용덕의 반론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에서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의 원용덕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로 박정희의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밑 문주리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것이라고 말했다.[100]
제3공화국 초기(1963 ~ 1964)
한편,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21] 12월 6일 비행기편으로 서독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독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 때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1963년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101]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101]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 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102]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여촌야도)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103]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104] 1963년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21] (→한월 관계)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21]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105]
한일협정 전후(1965 ~ 1966)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106]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106]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106]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106]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미국 대통령 존슨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107]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107]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107]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다.[107]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107]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은“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108]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109][110]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111]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112][11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114] 신용하 교수는 "박 정권이 6,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독도영유권 포기, 문화재포기, 징용·정신대등의 강제저축금반환포기 등의 국익을 팔아먹었다"고 주장했다.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 [115]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116]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116]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116]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116] 1967년 9월 20일 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74]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 ~ 1971)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117]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117]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117],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117]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117]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21]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118]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119]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21]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21]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규모의 땅을 구매하였는데 이 땅에 신원 조사 등 갖가지 심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여름이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울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박정희가 구매한 땅 중에는 소금기가 많은 땅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결국 박정희의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며 박정희가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지만 해마다 관리비 명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에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거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120]
김신조사건 1.21 사태 (1968)
1·21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북한의 호전성이 드러나고 반공의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 문화 정책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21]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 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다.[21]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2년-1967년),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7~1971년) 등을 수립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세웠다.[21]
그런가 하면 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21]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21]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일반 영세 기업체들이 산집해 있는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21]
제4공화국
제4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월 유신 직후 (1972 ~ 1973)
이 부분의 본문은 10월 유신입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21]

유신의 실시 배경에 대해 조갑제는 1964년 6·3 사태를 원인으로 제기하기도 한다. 64년 당시의 신문을 읽던 조갑제는 민정 출범 후에 박대통령은 민주적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윤보선과 야당 계열에서 선수를 쳐서 선동하고, 거짓 폭로전을 벌이니까 이런 것들이 박정희의 생각을 경직시켜 독재의 길로 가도록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내리기도 한다.[121]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북한과 두 차례 접촉하였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122]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21]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21]
육영수 피격 사건
육영수 저격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 참석하여 광복절 30주년 기념사를 하였다. 그러나 관객을 가장하여 앉아있던 문세광이 난입,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격하였고 박정희를 쏘려 하였다.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육영수는 박정희를 막으려 자신이 대신 총을 맞았고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연설대 아래로 피했던 박정희는 다시 나타나 광복절 30주년 기념사를 계속하였다. 연설 내내 박정희는 침착을 잃지 않고 축사를 마쳤다. 범인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문세광의 대한민국 입국과 총기 입수를 도운 일본인 전직 경찰관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새마을 운동
1967년 12월 1일에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21]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123]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123]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123]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21]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123]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 원, 72년 33억 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원, 1974년 308억 원, 1979년에는 4252억 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 원에서 1979년 2032억 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124] 비슷한 것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도 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124] 결과적으로는 농가소득이 10배 늘었지만. 농가 부채가21배 늘어 겉보이기식의 정책이 되었다.[125]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 ~ 1978)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126]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27]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128]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시(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129]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 |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
” |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와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 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130]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21]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21]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131][132]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133]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134]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35]
코리아 게이트 사건
대한민국의 인권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136]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977년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의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은 지미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고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를 이유로 군사원조에 대한 중대한 논의가 진행중일 때, 한국에 유리한 결정을 얻으려고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136]
말년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137]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138]
1979년 10월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방문,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영삼 제명사건은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139]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지미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140]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141]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 [142][143]
사망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144], 싱가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145]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8시 ~ 10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1세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10.26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박정희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146] 김재규는 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146]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146]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14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146]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의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 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 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146]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147][148][149]
최규하 추도사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장 당시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암살 배후 의혹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과 CIA가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미국 등의 개입에 대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50]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150]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151]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151] 박정희는 미국의 경고에도 1978년 이후로도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계속 증폭되었고, 이는 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사후 영향력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152]국가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 [153]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 등으로 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154]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1999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이라는 명칭으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시민의 권익증진을 우선하는 정책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환경보전 정책은 더욱 후퇴되었고 무분별한 개발로 농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55]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육군 소장인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박정희와 차별을 두었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 [156]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 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12]
구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중 일부는 부정축재혐의로 제거되었으나, 일부 정치금지법에 제한되지 않은 구 공화당과 유정회 인사들은 1981년 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정치적 유산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갔다.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한 국민당은 몰락했으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였던 일부 공화당계 인사들이 풀려나면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한 인사들은,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고 일부는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이후 친박연대를 창당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박정희의 셋째 딸인 박서영 역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8년부터 한나라당 충북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직선거법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2009년 7월 출소했다.[157]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158][159]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행정수도 이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7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이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다”고 발언하였다. [160]
이명박 대통령이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가 충돌했다. 친이계와 김영삼은 연일 영남지역주의와 박정희 집권기를 비판하며 친박계를 공격했고, 대구경북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역 정치권과 친박계는 반발했다. 박근혜가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력히 주창하는 데는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선친의 유훈(遺訓)’의 영향이 있을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돌이라는 평가도 있다.[161]
출처: 위키 백과
박정희가계도
박정희 (1917~1979)
박정희는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인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 1871년 ~ 1938년) 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 1872년~1949)에게서 5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동희 (1895~1967)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는 66세때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면 상모리에서 농사꾼으로 살다가 죽었다.
박동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박재홍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할 직장을 갖지 못하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을 지낸 박태준 포철 사장이 비서실에 취직을 시켜 주었고, 28세에 포항종합제철(주)의 행정실장(1969) , 32세에 동양철관(주) 을 설립하여 사장(1973)이 되었으며,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는 정치판에 들어오지 않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1대부터 민정당 국회의원후보로 출마하여 구미, 선산,군위, 칠곡군 지역구에서 당선되어(1981) 내리 4선을 했다. 14대 때는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13대 총선 때는 사촌동생인 박준홍과 맞붙어 박정희 일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는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와 결혼을 하였다.
박동희의 딸 박재선은 1971년에 남편을 따라 도미(渡美)했다. 남편 정동하(鄭東河)는 경북대 의대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해 그곳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1996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입당했다. 출처: 월간중앙
박무희 (1898~1960)
박정희의 둘째형 박무희(武熙)는 지주 장승원으로부터 논 다섯 마지기를 빌려 부쳐먹던 가난한 소작농이었는데, 큰형 박동희와 마찬가지로 경북 선산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살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에 성공하기 1년 전인 1960년에 사망했다.
박무희는 2남1녀를 두었다. 박무희 일가는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웠다. 장남 박재석(在錫)은 한때 구미에서 연필장사를 했고, 차남 박재호(在浩)는 벽돌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등극으로 신세가 폈다. 박재석은 박정희 재임 시절 국제전기기업 회장을 지냈고, 박재호는 동양육운 회장을 지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국제전기기업의 이사 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다. 출처: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
박귀희 (1902~1974)
박정희의 큰 누나 박귀희(貴熙)는 박정희가 태어나기 전 칠곡군 석적면의 은(殷)씨 집안으로 출가해 그곳에서 살다 생을 마쳤다. 박귀희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한 3남 은희만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은희만이 가수 은지원(殷志源, 1978년 6월 8일 ~ )의 아버지이므로. 은지원의 할머니가 박정희의 큰누나가 된다.
박상희 (1906~1946)
박상희(朴相熙)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언론인이며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의 셋째형이기도 하다.박정희는 형제 중에서 특히 셋째형 상희씨 가족에 애틋한 감정을 가졌다. 해방후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던 박상희는 집안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형제이기도 했다. 구미의 박정희가에서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상희”라고 할 정도로 집안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박상희는 일제 때부터 신간회 간부로 항일투쟁을 벌여 구미 좌익계에서 영향력과 신망이 대단했는데, 구미폭동을 지휘하다 경찰에 사살됐다. 당시 나이 39세였다.
박정희는 박상희가 남겨두고 간 유족에게 유달리 애착을 가졌다. 군인 시절에도 틈틈이 셋째형 일가를 도왔다. 그중에서도 박준홍(朴埈弘: 1947~) 은 외아들이자 유복자였다. 박준홍은 1970년에 경희대를 졸업하였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유학(1974년) 까지 다녀왔는데, 박정희의 배려로 국토통일원(1974년) 과 무임소장관실 정무조정실장으로 근무하다 유신 말기에는 대한축구협회장(1978년) 까지 지냈다. 현재 한국정경문화아카데미 회장 겸 자민련 당무위원으로 있다.
박상희의 딸 박영옥(朴榮玉: 1929~)은 김종필과 결혼했다. 3공화국 때부터 ‘영원한 2인자’로 살아온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박상희의 큰사위다. 어릴 때부터 셋째 형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을 귀여워했던 박정희는 군에서 만난 장교 김종필을 배필로 주선했다. 이후 김종필은 박정희사단의 2인자로서 5·16 쿠데타를 기획해 성공시키고 3공화국을 출범시키는 데 주역이 됐다.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었다.
박상희의 둘째딸 박계옥(桂玉)은 김용태(金龍泰)씨(민간인 신분으로 5·16에 참여해 후에 국회의원과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金龍泰와는 동명이인)에게 출가시켰는데, 박정희는 생전에 ‘조카사위 김용태’를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도록 했다. 김용태는 1984년 처남인 박준홍과 함께 사업을 하기도 했다.
셋째딸 박금자(金子)는 총리실에 근무한 적이 있는 반기언(瀋琪彦)에게 출가시켰고, 막내딸 설자(雪子)씨는 벽산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인득(金仁得)씨의 차남 김희용(金熙湧) 현 동양물산 회장과 결혼했다.
박재희 (1913~1996)
박정희의 둘째 누나 박재희는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다닐 때 남편 한정봉(韓正鳳)씨가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박정희가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친근감을 나눈 사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상주의 모 국회의원이 재희씨 부부를 서울 성북동으로 모셔왔다. ‘대통령 누님’ 집에 청탁꾼들이 몰려들고 정치인들도 기웃거렸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경찰을 배치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집권 초기 친인척 관리를 맡았던 대구사범 동기동창 권상하(權尙河) 비서를 보내 상주로 내려가라고 압박했지만, 재희씨는 “대통령 누나는 서울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며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버텼다.
박정희 (1917~1979)
박정희는 육영수와는 재혼이었다. 육영수와 사이에 박근혜(槿惠·현 한나라당 부총재)·박서영(書暎·현 육영재단 이사장)·박지만(志晩·사업) 3남매를 두었고, 1950년에 이혼한 첫부인 김호남(金好南: 1920~1990)과의 사이에서는 큰딸 박재옥(在玉)을 두었다.
박재옥의 남편 즉, 박정희의 맏사위가 한병기(韓丙起: 1931~)인데,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일 때 전속부관이었다. 부하 김종필을 조카와 인연을 맺어준 것처럼 박정희는 한병기를 첫째 딸과 맺어 주었다. 1931년 강원도 속초에서 출생. 박정희가 쿠데타에서 성공한 후인 1961년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뉴욕 총영사로 부임 → 건설공제조합 이사장(1967~69) → 선주협회 제7대 회장(1970) → 설악문화재단 이사장 → 주 칠레(1974), UN, 캐나다 한국대사 → 숭실대학교 강사 → 제8대(1971.7~1973.3) 국회의원(강원도 속초,양양,고성 지역구) → 민주공화당 총재 특별보좌관(1979) → 설악관광(주) 회장(1980~) → ※ 박정희가 죽은후 권력에서 멀어졌다가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대로 재기하여, 방송개혁위원회 의원 → 외무부 정책자문위원(1990) → 국무총리 자문위원장 → 자민련 당무위원(1996) . 2남 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한태준, 한태현이다. 참고: 청주한씨중앙종친회.
둘째딸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이다. 참고: 정수장학회는 박근혜가 오빠라고 부르던 전두환이 챙겨준 생계용 배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셋째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박정희과 육영수가 모두 사망한 1982년 풍산금속 사장 유찬우(柳纘佑)의 장남 유청(柳靑)씨와 결혼했지만 몇달만에 이혼했다. 육영재단 이사장이다. 2008년에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를 지낸 신동욱(1967~)과 재혼하였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朴志晩: 1958~) 은 상습적인 마약투약등으로 화제가 되었음에도불구하고 주위의 도움으로 전자소재기업이며 상장회사인 주식회사 EG 대표이사로 살고 있다.
육영수 (1925~1974)
박정희의 두번째 부인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아버지 육종관(陸鐘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1남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옥천의 만석꾼으로 유명했다. 보수적인 토호였지만 일찍이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옥천·대전 일대에서는 최초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다녔고 당대의 유명한 연예인이나 영화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다만 당시 부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축첩을 했는데, 그래서 집권 초기 박정희의 장모 이경령은 청와대에서 살고 장인은 소실과 함께 서울에서 기거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육인순
육영수의 형제로는 큰언니 육인순(陸寅順·1914∼1972), 오빠 육인수(陸寅修·1919∼2001), 여동생 육예수(陸禮修·1929년생)가 있다. 박정희가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신 장모 이경령은 말년을 청와대에서 보냈고, 주로 육영수가 부른 것이기는 하지만 처조카들도 자유롭게 청와대를 출입했다.
육영수의 형제들은 박정희 형제들과는 성장배경이 달랐다. 명문가였던 만큼 집안에 인재들이 즐비했다. 박정희 처가의 주요 인물들은 ‘처형’인 육인순의 사위들이었다. 육인순은 22세에 춘천고보와 경성제대 법대를 나온 인텔리 홍순일(洪淳一)과 결혼했다. 일제때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은 육인순과의 사이에 3남5녀를 낳았는데 6·25때 납북되었다.
육인순은 박정희가 권좌에 오른 직후인 1963년 서울시립부녀사업관장으로 임명됐고, 이어 당시 동대문구 망우동에 혜원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박정희 재임 시절 처가쪽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인물이 육인순의 맏사위 장덕진(張德鎭·부인 洪銀杓)이다. 장덕진은 고려대 법대를 나와 사법·행정·외무 ‘3시’를 패스한 수재였다. 장씨는 재무부 이재국장 겸 대통령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 겸 대통령외자관리 수석비서관, 경제기획원 차관, 농수산부 장관, 8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장덕진씨는 1980년대 말부터 국내정치에서는 발을 빼고 만주와 러시아로 눈을 돌려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 직함은 대륙종합개발 대표이사 회장이다
둘째 사위는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한승수(韓昇洙·부인 洪昭子). 춘천고·연세대 정외과·영국 요크대를 졸업하고 줄곧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지냈다. 6공 때인 1988년 13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6공과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상공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주미 대사,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을 지냈다. 민국당 간판으로 16?선거에 당선된 뒤, 현 정부에서도 외교통상부 장관이 됐다. 장덕진과 한승수는 춘천고 동문이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이화영의 딸 이희현과 결혼했는데, 이화영은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다.
동양고무벨트의 창업자 김도근의 장남 김진재는 박정희 시절부터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는데,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 다.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한승수의 장인 홍순일은 일제때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셋째사위는 유연상(柳然常·부인이 洪晶子)씨. 고려대 경제학과, 보스턴대 대학원 등을 나왔고 미국에서 증권회사를 다녔다. 영남투자 회장을 지냈고 영남대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다.
넷째사위 정영삼(鄭永三·부인 홍지자)은 현재 조흥관광진흥(한국민속촌) 회장이다. 박정희 재임 시절에도 모직회사를 운영하는 등 줄곧 재계에서 활동했다.
윤석민(尹錫民·부인이 홍재희)씨는 다섯째사위다. 청주고·고려대 법대를 나온 윤석민은 한국 해운업계의 ‘간판’이었던 대한선주 회장을 지냈고, 11대때 국민당 간판으로 국회에 진입해 국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육인순의 사위인 장덕진·한승수·윤석민 3인은 비록 시기는 다르지만 국회의원을 지낸 ‘3동서의원’으로 헌정사에 기록됐다.
육인순의 장남 홍세표(洪世杓)는 춘천고·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평생 ‘뱅커’로 일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다. 차남 홍국표(洪國杓)는 미국으로 이민갔고, 막내 홍민표(洪民杓)는 현대자동차 상무이사로 재직중이다.
육인수
육인수(陸寅修)는 육영수의 오빠이며, 일제때 도쿄(東京) 무사시노(武藏野)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뒤 진명여고·대구고·서울고 등에서 수학 선생님으로 재직했다. 육인수는 공화당 공천을 받아 1963년 고향인 옥천·보은에서 출마해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평범한 교사에서 일약 선량이 된 것이다. 이후로도 육인수는 10대까지 내리 5선을 지냈다. 국회 문공위원장, 공화당 당무위원, 공화당 중앙위 의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육예수
박정희의 처제인 육예수(陸禮修)의 남편은 무던한 성격으로 알려진 언론인 조태호(趙泰浩)다. 함남 북청 출신인데 해방후 고려대 총무과장으로 재직했다. 1965년에 ‘5·16 장학회’ 이사가 되었고, 문화방송 이사·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말년에 “부산일보”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88년 사망했다.
'자유공간 > 자유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서일기--동산계곡 (0) | 2013.07.26 |
---|---|
작은 행복 (0) | 2013.06.15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0) | 2013.01.26 |
부유한 양반들의 안빈낙도 (0) | 2013.01.25 |
安貧樂道 (0) | 2013.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