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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덕계 /그때 그시절

프리맨10 2020. 7. 22. 10:09

내고향 덕계

2009년 말경에 아포읍지(牙浦邑誌)가 발간되었다.

아포읍지를 받은후 무심하게 그냥 책장에 꽂아만 두었는데 

요즘들어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읍지를 찬찬히 훌터보게 되었다.

방대한 자료수집과 읍지발간을 위하여 애쓴 분들의 노고에 경하를 드리는 바이다.

읍지를 참조하여 마을의 연혁과 마을 곳곳 지명에 대한 유래와

그와 관련된 단편적인 추억담을 단상으로 기술해 보고저 한다.

 

1.연혁

조선시대에 개령현 동면에 속하였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면을 폐하고 마암(馬巖),작동(鵲洞),

덕계(德溪)를 통합하여 아포면 봉산동(鳳山洞)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계를 봉산3동으로 분동하여

1988년 5월1일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2. 위치

  읍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3km 지점에 위치하며 동으로 마을의 남북으로 흐르는 연봉천(延鳳川) 하안의 큰들과 남쪽은 작동과 경계를 이룬 까치산(鵲山)의 능선으로 연결되고 서쪽은 대신3리 동신(東新) 북으로 김천(甘川)과 인접한 개령면(開寧面) 광천리(光川里)와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 원창평야와 의리(義里)를 접하고 있다.

 

3.마을의 유래  

조선중기 약300여년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홍(金䨎)이 김천 하로(賀老)에서 입향하여 정착하였으며, 후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농가의 경제는 수세(水勢)와 야세(野勢)가 좋아야 하는데 마을앞에 연봉천과

감천과 합류하면서 봉산평야와 원창평야의 넓은 두 들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두 내(溪流)의 덕분이라하여 덕계(德溪)라 

불렀다고 한다. 후에 일선김씨(一善金氏)가 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4.마을 곳곳 지명에 따른 유래와 추억담

 

 내고향 덕계동네의 취락형태를 풍수적으로 보면 인근 말바우나 작동과는 비교가 된다.

말바우는 남북으로 길게 퍼저있는 형태이고 작동동내 또한 동서로 길게 퍼저있는 형태인 반면에

덕계동내는 당산과 뒷고개 능선으로 해서 앞산으로 이어진 골에 아늑하게 감싸저 있는 형태이다.

60호 정도로 큰마을은 아니었으나 그러한 풍수형태적 영향인지 상대적으로 동민들과 동갑내기들의

단합과 결속력이 대단히 좋았으며, 들까지앞들과 연이어 넓은 역들과 원창들이 있어 아포면에서

대지동 시내이와 함께 부촌(富村)으라 했다하며 상대적으로 교육열도 높은 편 이었다. 

 

 역들(驛坪)

 마을 서북쪽  봉산(鳳山)과 감천(甘川)사이에 넓은 들이 있는데  들 이름이 역들(驛坪)이며

조선시대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관할 양천역(楊川驛)의 역둔토(驛屯土)가 있어 불려진 명칭이다.

옛날 고려에서 조선말기까지 전국곳곳에 중요한 교통 통신 기관인 (驛站)이 있었으며, 역참에는 병력이 주둔하고

말을 사육하여 파발마를 관리들에게 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이곳 양천역은 성주와 상주를 잇는 주요 교통요충지였다.

조선말기 고종(高宗) 건양(建陽) 원년(元年) 병신년(1896)에 양천역이 혁파(革罷)되어 말을 방목하던 역산과 둔전인

역들이 현재는 농지정리를 하여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5,60년대 앞냇가 방천과 감천냇가 방천(사선방천)이 만나는곳, 방천 밑자락에 외딴초가집(순상네집)이 한채 있었다.

그곳엔 역들에서 원창들 신사보로 이어지는 큰도랑이 있고, 앞냇가 방천 하상밑으로 횡단하는 노깡(콘크리트원형관)

으로  이어진 굴음(용수관로,연장 약200m)이 있다.  

어른들은 굴음 입구에 횟가루를 뿌려놓고 신사보 출구쪽으로와 힘없어 물위에 떠올라 오는 장어,메기.잉어등을

뜰채로 잡아 올려  잡기도 하고가끔 물이 줄어 굴음에 물이 반쯤 줄면 직접 몇몇이 굴음 입구로 들어가 신사보

출구로 나오면서 고기를 잡곤했다

 

천도말산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며 마을 앞산이라하며 조선시대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 관할하에 역말을 사육

관리하던 곳으로 천도마(泉道馬)가 구어체로 천도말로 불려진것 같으며 산 8부능선에 말샘이 있어

물이 좋아 목욕을  했다 한다.

 

옛날 말샘이었던 그곳이 필자인 내가 어릴적에도  항상 물이 나는 웅덩이(沼)로 있었다.

어린 동심에 그곳에서 물이 끓어올라 무지개가 솟는다고해 여름날 비가 게인후 앞산에 걸린

영롱한 무지게를 쫓아  앞산 웅덩이로 달려가보곤 했다.

그리고 천도말 산마루  뒤들쪽으로 곰같은 큰바위가 하나 있어 동내 아이들 산에 오르면 그곳이 놀이터였다. 

천도말산 들까지 쪽 산자락은 완만한 경사의 넓은 풀밭이며 위쪽에 있는 묘지 좌판에  웃옷을 벗어놓고

그곳에서 동내 아이들 마때(잣치기)놀이를 하곤 했다.

 

봉산(鳳山)

덕계마을 서쪽에 있는 산이 작동마을에서 보면 까치형상을 하고 있어 까치산(鵲山)이라고도  부르나

실제 이름은 봉산(鳳山)인것 같다. 봉산봉에서 서쪽으로 산세가 길게 뻗쳐있다.

 

어릴적 가끔씩 봉산봉에 올라 산아래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작게 내려 앉아 있는 마을 풍경들을 보면서 

호연지기(浩然之 氣)를 키우곤 했다.

 

당산(堂山)과 동제(洞祭)

당산(堂山)은 마을 신앙으로 동제를 올리는 동내 뒷산을 일컬으며,동제(洞祭)는 지금은 사라진 상태이나

내가 어릴적만 해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동제(洞祭)를 올렸는데  이맘때가 되면  마을동회에서 마을주민중

깨끗한 사람을 제관(祭官)으로 선정하여 동제 3일전부터 목욕제개하고 출입로에 금출을 치고

비린내나는 음식을 피하고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금하였다.

그리고 동내집 대문앞및 길에 황토를 드문드문 뿌려놓아 액운을 막게 했다.

 

공동우물

옛날 마을 공동우물터는 아낙네들의 사랑방이었으며 우물터에 모여 동네 이러저런 모든 소식이 전해진다. 

덕계마을에 공동우물이 2개소 있었는데 웃마에는 깊이가 꽤나 깊은 (읍지에 약25m정도로 되어 있으나

그렇게 깊지는 않고 15m정도 됨직함) 우물이었으며 두레박을 던지면 한참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맛이 좋고 우물이 깊어 물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스했다. 

아랫마 동회관앞의 아랫샘은 우물통의 깊이(읍지에 역12m로 되어있으나 5m정도였음)가 깊지않고

우물통이 넓고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아 이사간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한다.

마을에 흉사가 있을시에는 "삼태기"로 샘을 덮었고 불결한 병이 돌고나면 샘물이 황토물로 변하여 퍼내고

다시 청소 해야만 했다. 후에 70년도 들어 집집마다 지하수를 개발하여  공동우물의 기능이 점차 사라져갔다.

 

오래내강(梧來川)

감천 지류로서 마을앞 앞들을 감싸고 돌아 흐른다. 오봉천(梧鳳川)에서 내려오는 내라하여 오래천(梧來川)이라 했고

1970년대 제방 보강공사를 하면서 공사업자가 연봉천(延鳳川)이라 호칭한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마을앞 냇가는 오래천 하류지역으로 모래가 보드라운 백사장에서 씨름등 놀이를 하는 놀이터였다.

여름철 폭우가 솟아지는 날엔 금새 황톳물이 거품을 품고 소용들이치며 흐르다가도 몇일이 지나면

맑은 시냇물이 되고 동내아이들 모두나와 미역을 감고 송사리등 천렵을 하곤 했다.

 

그리고 앞냇가와 감천이 만나는 하구엔 넓은 백사장이 형성되어 

손으로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곱디고운 금모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여름이면 근방에서 아낙내들이  수박등을 사 들고와 파라솔 펴놓고 모래찜질들을 하곤 했다.

 

원창 신사보쪽엔 감천내에서 원창들 용수를 위하여 보가 설치되어 있고

제방밑으로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용수로 수문이 있어 그곳에서 천렵을 하곤했다.

(보관리를 위하여 신촌에서 파견나온 일명 영복이네 봇집이 있었으며

사라호 태풍으로 봇뚝제방이 터저 영복이형네는 덕계동네로 이주해 정착하였고

후에 다시 봇집이 생겼다. 일명 팔선네 봇집이었다.)

 

고방걸

옛날 마을입구에 넓은 마당과 창고,초가삼칸짜리 집이 있었다.동민들이 짚일을 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마을앞 들까지로 가는 입구였으며 필자의 어린시절엔 창고 및 집은 

없어지고 고방걸이란 이름만 그대로 불려지고 있었으며 주변에 소나무숲과 큰고목나무가 몇그루 있어

여름날 농부들 들일 가지전 나무그늘에서 늘어지게  한숨 낮잠을 자는 곳이었다.  

 

세보덤붕(新洑池)

덕계마을 앞냇가를 넘어 뒷 제방밑에 있고 새보들의 저수지로 여름철 큰들 몽리자들의 목욕장이며

제방에 우거진 아카시아 노목숲이 있어 휴식하기 좋은 장소였다.

또한 여름에 삼(大麻)을 수확하여 삼솥을 걸어놓고 삼을 삶는 곳이었다.

 

가죽지

마을 동쪽 거물들 제방위에 고목 가죽나무가 군락(群落)을 이룬곳이다.

 

행상[喪輿]집

마을 뒷산 동북쪽 역들에 있었다.

 

5.유무형 문화유적

 

신보송공불망비(新洑頌功不忘碑)

덕계마을 앞산 끝자락에 바위밑에 철종(哲宗)14년(1863) 수립된 송덕비이다. 

연봉천 중간지점에 관개보를 막아 관개용수의 관리가 편리하여 경작에 많은 혜택을 입으므로

몽리자들이 그 공덕을 기려 세워진 비이다.

 

내가 어릴적 내용도 모르고 움폭 들어가 비도 맞지않는 바위 벼랑에 이상한 비석이 세워져있어

어린마음에 신기해 하며 가보곤 했다.

 

봉산동 고분군(鳳山洞 古墳群)

덕계마을 뒷산에 고분군이 형성되어 토기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물레방아

봉산들 거물보 수로끝에 위치하여 곡식을 도정하였다.

 

패(牌)찿기

부락의 도둑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락민이 조(組)를 구성하여 자시(子時)부터 숨겨진 패(牌)를 찿기 위하여

집집마다 "패 주소"를 반복하며서 순찰을 했었다. 동내를 몇바퀴 순찰을 돌고 나야 어느집에서 패를 준다.

내가 어릴적도 패찿기를 하였다.

 

달집태우기 ,횟불싸움

마을앞산 천도말에서 정월대보름에 달불을 피웠고 횟불을 만들어 이웃작동마을과 횟불싸움도 하고했다.

 

그네뛰기

오월단오절이 되면 동민들이 굵은 새끼줄을 엮어  천도말산에 그네를 매고 남녀노소 동민들이 모두나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고 했다.

 

추억 한토막/그때는 그랬었지

 

◆5.60년대 어린시절  동내 바로 이웃에 방식이란 불알 친구가 있다.

가까이 있다보니 틈만나면 어울려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버들피리도 만들어 불고짠디도 캐먹고,

삐삐 오디도 따먹고땔감용 삭다지 나무도하고들판 도랑이나 작은 덤붕으로 다니며 물고기도 잡고

감천냇가 자갈밭에서 낄리기(물떼새)새알도 줍기도 하곤 했었지.  

한번씩 도랑을 막아 물을퍼 물고기를 잡던지 소꼬리 소총을 뽑아 목매를 만들어 보리밭에서 노고지리를 잡는 날이면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자지러져날 저문지도 모르고 있다가 어두어 지니 덜컹 겁이나 집에 달려 오곤 했다.

저녁이 되어 어둡 어둡해도 애들이 돌아오지 않차, 양집 식구들이 걱정이 되어 등불을 들고  깅수야방식아하고

이름을 불러대며  찿아 나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이 아닌가.  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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