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간/회상

추억여행/자전거타고 동네 한 바퀴

프리맨10 2021. 3. 3. 07:34
원 발행일자:2020.9.15    /   목록편집으로 발행일자 2021.3.3일자로로 글이 이동됨

 
 
2020년 9월4일 충주형이 전화가 왔다.
 고향집 텃밭에 심어놓은 땅콩이 캘때가 되었다며  땅콩도 캐고
누나들이 심고 싶어하던 무우 파종도 좀 하고 
내친김에 조금 이르긴해도 산소 벌초까지 하기로 했다.
 
더위을 피해 5일날 새벽에 벌초부터하고  땅콩도 캐고 무우 파종도 하기로 했으나 
4일날 저녁무렵에 고향집에  가니 벌써 형이 낮에  땅콩은 다 캐놨다.
봄에 우리 형제들과 서울에 사는 누님 친구인 상열누나와 같이 심었던 땅콩인데
방구치들이 경작한것 치곤  제법 알이 굵고 많이 달린 편이다. 허허 그것참
 
5일 새벽 예초기로 산소벌초를 하고, 오후에 이웃 용수아제 코치를 받아 무우파종까지 마쳤다.
상시 이곳에 있을수 없는 상황이라 용수아제가 발아가 되면 약도 치고 관리까지 해 주기로 했다.  
대신에  한번씩 들리면 소주나 한잔 달라신다.
하하 고마운 일이다.


9월13일
일주일 전쯤 텃밭에 파종한 무우도 궁금하고
구미 집에서 초벌 건조한  땅콩도 갔다놓기 위해 10시쯤 출발 고향집에 들렸다. 
아포 고향집 텃밭에 가보니 5일날 파종한 무우가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날씨도 제법 선선한 기운이  라이딩하기에 좋은 날씨인것 같아
 그동안 긴 장마와 폭염으로  7,8월 한동안 자전거 라이딩도 하지 못했는데
내친김에 승용차로 자전거를 실고와 주변 동내한바퀴 라이딩도 하기로 했다.

자전거 타고 동내한바퀴

  고향집→ 말바우동내→연봉→김천혁신도시→대신→고향집
차에서 자전거를 내려 슬슬준비하여 출발하면서 보니 10시 49분이다
고향집에서 말바우로 가는 고개를 넘어 연봉리를 지나 오봉저수지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혁신도시로 가는 길이 나온다.


김천 혁신도시

혁신도시를  가로지르는 개울과 산책로겸 자전거도로가 너무좋다..
마치 서울 청계천을 연상케 할만큼 율곡천으로 흘러가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인상적이다.
 


혁신도시 안산공원

자전거 도로로 해서 달리다 보니 공원이 하나 나타난다.
혁신도시 안산공원에 있는 그대한 사람 다리 조형물이 압권이다.
전국에 공모하여 행정안전부가 상징조형물 제작설치 평가위원회를 구성
엄정한 심사를 거쳐 출품작중에 선정된 조형물이다.


공원 산책로 주변에 습지공원도 잘 조성되어 있다.


혁신도시를 빠져나오니  감천지류인 율곡천이 나온다.
 율곡 천변  자전거도로가 널직하고 시원하다.

 율곡천변을 한참 달리다  초곡리로 진입했다.
다시 초곡리에서 대신으로 가는  구길로 해서 대신에 당도했다..


  얼마전부터 대신역 입구에  대신역 카페 안내간판이 서있어 
호기심에 한번 가 보고 싶던차에 오늘 한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대신역 카페

역사건물앞에 다가서니 출입문옆에 박해수시인의 "대신역" 시비가 서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옛 대합실이었던 공간 한켠에 카페 데스크와 주방이 들어서 있고
옛 역무원실이 있었던 곳은 벽을 털어 홀을 만들어 테이블이 노여 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분위기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분위기다.
 
이곳은  정말 옛날 어린시절 아련한 추억과 낭만이 서려있는 곳이다.


신작로 철길따라 대신역이  보인다.
대합실엔  승객들로 붑비고
 개찰구가 열리면 승객들 우르르 플랫홈으로
저멀리 기적소리  신호등 빨간불 들어오고
 역무원 깃발들고 플랫홈에 서있다.
열차가 서서히 플랫홈에 들어와
기다리던 승객들 서둘러 탑승하면
 역무원 파란깃발 흔들며 수신호 하고 
열차는 기적소리 울리며 서서히 출발한다.
 
이것이 6,70년대  대신역의 풍경이다.
한때는 북쩍이던 대신역 이었는데 
외로운 세월을 못이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카페로 전용되고 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카페에 비치는 조명 불빛마저 왠지 슬프보인다.
 
  카페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 냉커피 한잔 시켜 먹고 있으려니 
자연히 추억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60년대 당시에 우리나라는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라 경부선 철도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구미에서 김천으로 가는 도로는 노선 버스도 없던  비포장 그야말로 울퉁불퉁 신작로 였으며
김천을 가기위해선 20리길을 걸어서 가던지 아니면 대신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만 했다.
하물운송 또한 마루보시라 하여 대신역에 주재하여 대단히 번창했던 역이었다.
 
나하고 띠 동갑인 큰누나(길자)가 김천여고에 다닐때 처음 얼마간 통학열차가 없어
김천학교까지 걸어 다녀야만 했으며  트럭을 몇대 가지고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덕에
트럭이 김천방향으로 갈때면 그것을 타고 가곤 했다한다.
그후 얼마안되어 통학열차가 생겨나 그때부터 김천에 있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대부분 학생들이 통학을 하였으며 열차를 타기 위해 대신역이 유일한 통료였다.
등하교를 할라치면 학교에서 통학열차시간에 맟추어 김천역까지 걸어와 열차를 타야하며
대신역에 내려 다시 집까지 10여리를 걸어가야만 한다.
일부 학생들은 그러한 번거러움 때문에 김천에서 자취를 했으며
그중에 비교적 여유가 좀 있었던 집 학생은 하숙을 하기도 했다.
나도 부모님 덕에 김천에서 하숙을 하며
주말이 되면 빨래감을 가지고 집에 내려오곤 했다. 허허

 

카페 바깥 철로변에서 카페실내를 찍어려니 창문에 비친 내가 오버랩되어 기묘한 멋진광경이 연출되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며 한참을 그렇게 추억속에 시간여행을 하다가 내려왔다.


대신역 카페를 내려와 인근에 소재한 모교였던 대신초등학교도 가보기로 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사회복지시설로 활용하기위해 관리중에 있다.
 
60년대 초반 한때는 800건아가 운동장에 뛰어놀던 교세가 큰 학교였는데
70년대 들어 산업사회가 가속화 되어 농촌인구가 도시로 서서히 유입되고
지금은 인구 절벽시대가 초래되어 지방에 아동이 없어  폐교가 되는 사태가
야기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대신 초등학교
 
내가 다녔던 60년대에는  대신국민학교라 불렀다.
 
학교 교명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에는 초등교육이라 할수있는 곳이 서당이었다.
김홍도의 풍속도 "서당"을 보면 당시의 교육 풍속을 느낄수 있다.

김홍도의 "서당"

훈장님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는지 한 아이가 훈장님 앞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입을 가리고 킥킥대며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도 보인다.
그 중 갓을 쓴 사람도 보이는데 갓을 썼다는 것은 장가를 갔다는 뜻이다.
김홍도는 지금의 학교와 같았던 서당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갑오경장이후 근대교육제도가 들어서고
1895년7월19일 서울에 8개 관립 소학교,각도에 공립소학교100여개 설립되고,
1906년8월에 통감부에 의해 보통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26년7월에 보통학교,소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1년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뜻으로 국민학교로 개칭되어 오다가
1996년 3월1일부터 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6.25전쟁이후 1954~1959년 의무교육 완성 6개년계획 실시로
다니지 못한 아동들이 한꺼번에 취학하는 바람에 한 학급에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학생들이 많았으며
전후 1차 베이비붐 시대가 되어 한집에 5,6남매는 보통이고 8남매 10남매등도 흔히 있어 
한학년에 2학급이었으나 한학급에 65~70명정도로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그러니 전교생이 800여명이나 되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옛추억이 새록새록 밀려온다.
내가 다녔을 때인 60년대 초반에는 어린마음에 운동장이 대단히 넓고(?)
운동장 가장자리로  아름드리 프라다나스 나무들이  서있었다.
지금은 운동장엔 잡풀이 무성하고 예전의  프라다나스 나무만 몇아름 거묵이 되어
그대로 옛날을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당시 운동장 우측에 철봉과 시소 회전놀이등 시설이 있었고,
넓은 운동장에선 쉬는 시간이 되면 남학생들은 작은 고무공으로 축구도 하고
ㄹ자 놀이 ,오징어놀이 ,강건너기 등 운동장에 선을 그어 편갈라 놀고 했으며
여학생들은 땅따먹기나 공기받기 고무줄넘기등을 했었지.


 

본관 건물은 당시엔 1층 목조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2층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되었다
학교 본관 좌측으로 교실건물이 별관으로 있었으며 1학년 수업을 그곳에서 했었다.
지금은 별관건물이 없어진 상태이다.
당시의 담임 선생님이 여선생님 이었는데 존함이 백영옥선생님이었다.
얼굴이 하얕고 갸름한 얼굴이 어린 마음에 참 예쁜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관 건물을 돌아 본관 뒷편을 둘러봤다.
당시엔 본관 건물 뒤쪽으로 공중화장실과 숙직실 강냉이죽을 끓이는 취사장및
연장등을 두는 창고등 부속건물이 있었고 우측으로 6학년 교실이 별관으로 있었다.
 취사장 뒤편 산밑으로 학교 텃밭이 있어 수시로 학생들을 동원 작물을 키우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숙직실만 있고 모두 사라지고 풀밭만 무성하다.
 
5,6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박상만 선생님이셨는데 학교 체육을 담당하셨다.
내가 달리기 넓이뛰기 높이뛰기 씨름등 운동을 잘하여 선생님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5학년때 부터 학교 대항 체육대회가 있을 때면 학교대표선수로 방가후 남아 운동연습을 시키곤했다.
연습을 하고나면 당시만 해도 귀했던 빨간사과하며 우유 비가등을 잔득 주셨으며
그것 때문에도 방과후 운동을 즐겨 했었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취사장에서 미국 원조로 나온 옥수수가루로 죽을 쑤어
형편상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당번들이 양동이에 타와서  배식을 하곤했다.
구수한 냄새에 먹고 싶어 내 도시락과 바꿔 먹기도 하고 했었지 허허...
 
그당시 전후 어려운시절이라 한 반에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애들이 1/3정도 되었으며
겨우 미국 식량원조에 기대어 우유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배급받고했다.
정부에서도 가난과 빈곤 퇴치를 위하여 총력을 기울일 때였으며 임시 시급한게 식량 증산 이었다.
대대적으로 식량 증산 운동이 전개되면서  비료공장시설들이 파괴되어 비료공급이 어려워
퇴비증산운동이 펼처지고 학교에서도 학생 일인당 풀을 베어오게해 퇴비장을 만들고 했으며
농촌에 쥐가 득실거려 쥐잡기운동이 전개되어 일인당 쥐를 잡아 쥐꼬리를 잘라 가져오게했다. 
어디 쥐를 그렇게 매번 잡울수가 있는가 꽤를 내어 오징어다리에 재를 뭍혀 가져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길없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하하


봄이되면  꽃동산에  봄소풍가고
어쩌다 시청각교육으로  "저하늘에도 슬픔이"등 영화을 보러 가는 날이면
  마냥 들뜬 기분으로 20여리길을 걸어  김천까지가
아카데미극장앞에서 김밥먹고 영화를 관람하고 했었지.
 
가을이 되면 매년 가울 운동회가 열린다.
이날은 학교의 축제날이며  그지역의 축제날이다.
운동장에 만국기가 걸리고 천막치고 솥걸어 돼지잡아 국 끓이고
엄마들은 계란 밤 땅콩등을 삶고 3단찬합에 도시락 싸와 온가족이 모여 온통 동내 잔치판이 된다.
그리고 내노라하는 지역 유지들이 모두 참석하여 찬조하고 내빈석에 앉아 관람들한다.
당시에 아버지가 대신국민학교 사친회장이셨다. 
 
겨울이되면 교실에 갈탄 난로를 피웠는데
그위에 선착순으로 해서 밴또(도시락)를 올려놔 높다랐게 쌓인다.
점심때가 되면 당번이 주전자에 물을 돌리고  따끗해진 도시락을 물말아 먹곤했다. 
 

학교를 오가는 등하굣길은
주로 집에서 작동주막으로 해서 신작로로 다녔다. 
말이 오리길이지 걸어가다보면 십리길은 됨직하다.
가끔씩 경부선 철도와 신작로사이 지름길인 장고개길로 다니기도 했으며
  게구쟁이들  장고개서 학교도 가지않고 놀면서 중간치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하교시엔 역들쪽 산기슭 오솔길로 해서 집에 가곤 했는데
가면서 길가 논에서 개구리알도 구경하고  산딸기도 따고 
오솔길 길섶 풀들을 묶어놔 무심코 걷다가 걸려 넘어지게도 한다.
그렇게 호작질을 하며 놀며 가다보면 해거름 해서야 집에 도착하곤 했었지.
허허 참 그때는 그랬었지.
 
참 옛날 이야기다.  옛추억을 다 기술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일이다.
옛추억을 뒤로하고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학교을 나왔다.


다시 고향집에 돌아오니 오후 1시경이 되었다.
전체 한바퀴 돌고보니 총연장이 20여km이다.
오늘 라이딩한 코스가 비교적 완만하고 평이하고 아주 좋았다.
새로운 코스를 하나 개발한 셈이다. 
한번씩 고향집에 갈때면 가끔씩 라이딩하면 좋을 것 같다.


집에서 준비해간 라면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쉬다가 집으로 컴백.
오늘도 고향쪽에 와 자전거타고  추억여행하며 힐링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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