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대나무의 전설
60년대 덕계고향마을에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니 이것은 전설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팩트이다.
아마 지금의 50대 이하의 사람들은 잘모를 일이다.
필자인 나도 국민학교 다니던 어린시절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어
짜집기한 것이라 내기억이 다소 사실과 다를수 있음을 밝혀둔다.
1960년대 농촌개몽운동으로 각 동네마다 4H구락부 청년단이 조직되어 활동했던시기다.
그 당시에 덕계동네 남녀 청년회가 주관이 되어 "쌍대나무"연극을 아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해
아포면에 센세이션을 일어켰다.
아마 다른 동네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일을 당시에 우리동네 청년들이 한 것이다.
서라벌예대 미술학부출신의 시내이(東新)의 윤두희님이 기획하고 총괄지휘를 했으며
덕계의 청년회 부녀회가 합심하여 저녁마다 모여 배역을 바꿔가면서 열의를 다하여 연습을 하였다.
드디어 학교 방학기간에 맟추어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날짜가 잡혀 공연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연에 들어가기 전 미리 홍보 포스트를 제작하여 아포면 일대 동마다 포스터를 붙혀 대대적 홍보도 하였다.
공연내용은 1부 메인공연으로 “쌍대나무” 연극공연을 하고 2부로 부채춤.장구춤.남양무용등 춤공연을
하는것으로 되어있다.
처음 기획의도는 1일2회정도 2,3일 공연으로 기획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고 공연을 본 관객들 입소문이 퍼저 점점 늘어나는 구름 관객들로 인하여
공연장에 발디딜 틈이 없이 꽉 들어차 미처 표를 사지못해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배우들이 화장실을 가질못해 요강단지에서 볼일을 볼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가피하게 공연이 연장되고 재연장되어 10일 이상 공연을 하게 되었다.
급기야 금릉군수에게 까지 소문이 들어가 관계관과 함께 직접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고
공연을 관람후 놀라울 정도의 감동적인 공연에 현장에서 바로 제의가 왔다.
금릉군에서 버스와 모든경비와 편의제공을 할테니 순회공연을 하면 좋겠다며
단원들과 상의후 연락을 달라고 했다.
공연이 마무리 된후 마을로 돌아와 회의 결과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시대라
다큰 처녀들 계속 바깥으로 돌리면 시집도 못간다며
부모들이 극구 반대해 무산되긴 했으나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다.
◈공연개요
1부공연
제목 | 쌍대나무 |
장르 | 연극 |
공연장소 | 아포 공회당 |
공연기간 | 1961년도 |
배역 | 아버지역-박성태, 계모역--김춘옥 , 철수(아들)역:김재기 ,애숙(딸)역--이정자 석돌(문간방 반벙어리 머슴)역--김경배, 회사사장역--김희중 ,경찰역--김영이 꼭지(꼽추였던 철수 수하)역--이팔군 |
줄거리 | 시골 어느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 두남매 철수와 애숙이 허드렛일을 하며 문깐방에 기식하는 반벙어리 석돌이 이렇게 4식구가 살던집에 어느날 못된 계모가 들어오게 된다. 계모의 구박에 반발하여 아들 철수는 가출하고 딸 애숙이는 가진 구박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애숙이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되고 병 수발을 하던 계모가 재산이 탐나 탕약에 독약을 넣어 아버지를 죽게하고 애숙이는 돈많은 사장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고향을 떠나 깡패 두목이 된 철수가 고향을 그리워 하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수하인 꼭지에게 먼저 고향집을 염탐하게 하여 계모의 악행을 알게된다. 집안의 내막을 알게된 철수는 분노하여 복수을 결심하고 고향집에 돌아와 동생 애숙이를 구하고 계모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자수를 한다. 어릴쩍 같이놀던 친한 친구가 경찰이 되어 친구인 철수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울면서 데려가는 슬픈사연의 연극이다. |
2부공연
부채춤 | 김옥배&박태자 |
장구춤 | 김재일 |
남양무용 | 김휘자&김송자&윤영애 |
◈공연전반에 대한 정리및 후기
당시 큰누나(길자)가 부녀회장으로 공연 전반에 걸쳐 스포팅하고 지원하는
총괄 매니저역할을 하였다.
공연 총괄 감독은 서라벌 예대 미술학부 출신 윤두희님이 무대장치및 연출 감독을 맡았으며
주인공 역활인 철수역에는 당시 한양대학에 재학중인 김재기, 애숙이역은 이정자,계모는 김춘옥,
아버지는 박성태 ,문간방 반벙어리 석돌역은 김경배, 회사사장역엔 김희중, 경찰역엔 김영이,
꼽추였던 철수의 부하 꼭지역엔 이팔군등이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하였다.
공연시기는 휘자누님이 김천여고2학년 시절로 기억한다고 하니 유추해서 보면
1961년도 여름방학때 였던것으로 추정된다.
모두들 정말 맡은바 배역을 훌륭히 소화하고 멋진공연을 연출했다.
특히 계모역을 한 춘옥이누나의 매몰차고 표독스러운 연기가 돋보이는 명연기였다는 평이었다.
그리고 문간방 반벙어리 석둘역의 경배형이 반벙어리연기를 아주 잘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 마을 공연이 끝난후 아포면에서 자극을 받아
후에 아포면 주관으로 "사도세자"연극을 기획하여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기에서 경배형의 "쌍대나무"의 연기를 평가받아 주인공역인 세도세자역에 발탁되어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2부행사에 춤공연이 있었다.
부채춤은 옥배형과 수용이형 누이동생 박태자가 커플로 색동저고리를 입고 공연을 하였다.
옥배형이 어릴적 부채춤등 춤을 잘추어 동내 잔치등에 불려나가 춤을 추곤 했으며
간혹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본영화 상영전 옥배형이 부채춤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장구춤은 당시 서울 서라벌고등학교에 다니던 재일이형이 한복을 입고 공연을 하였으며
남양무용은 휘자누나와 김천여고 친구인 김송자 윤영애누나가 함께 셋이서 공연을 했다.
몸에 딱붙은 새까만 팬티스타킹같은 옷을 입고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의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피나레 엔딩 신이 또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공연과정에 꼽추인 꼭지역의 팔군형이 고향집에 걸인행세를 하며 가서 "복 많이 받고 사시구려"라는
대사와 함께 마당에 칼을 꽃고 나와야 하는데 깜박하고 칼만 꽂고 나와서 머리를 걸쩍이며
"참" 하는 배꼽잡은 에피소드등 에피소드가 많았다 한다.
훗날 철수역의 재기형과 애숙역의 이정자누나가 이것이 연유인지 몰라도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어쨌던 필자인 내가 보기엔 시골 작은마을에서 이런 공연을 할수있었다는 자체가
너무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대를 통털어 이때가 덕계동네에 있어 문화예술의
찬란한 르네상스 시절이었음에 의심에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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