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여행기(국내)

옥산서원 탐방기

프리맨10 2021. 10. 14. 12:14

코로나가 창궐하기전 몇젼전에 처가의 처제들과 영덕바다가쪽으로 나들이 가게되었다.

처제들이 상주-영덕간 고속도로에서 인접해 있는 옥산서원을 잠시  둘러보고 가잔다.

그때는 지나가는길에  그냥  둘러보고 갔으나 다녀온후

  이언적선생의 행력과 독락당의 내력에 대하여 좀더 깊게 알게되어 

언제 시간이 되면 다시한번 현지를 재탐방해 보고싶던차에 .

마침 2021년10월5일 오후

보험청구 보완서류 관계로 포항(우리병원)에 가게  되었다.

   돌아오던길에  일부러 안강에 있는 옥산서원 독락당을 다시 한번 둘러보기위해.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를 타지않고 포항에서 안강으로 가는 28번 국도를 이용하여.

안강읍을 지나 조금더 가니 우측으로 옥산서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들판을 가로 질러 한참을 들어가니 드디어 옥산서원 입구가 나타난다.


 

옥산서원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

선조5년(1572)에 경주 부윤 이재민이 처음 세웠고,

그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을 형식이다.

구인당은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며

체인묘안에는 이언적의 위폐를 모셔놓았다.

옥산서원 유물관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국보제322-1호)50권 9책 완결본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때도

옥산서원은 훼철되지 않은 서원중의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선생은 조선 중종시대의 성리학자이며 정치가이다.

조선 1531년(중종 26) 1월 김안로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삭탈관직되어 낙향하여 자신의 행보가 가족은 물론 가문 전체에 화가 미칠가 염려하여자신의 종가인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선친의 휴양지였던 옥산에  은둔하며

1532년에 별채 서실인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집중하였다. 

 

이언적은 당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청산곡靑山曲'을 지어 노래했다.

"자옥산 깊은 곳에 초가 한 칸 지어두고 

반 칸은 청풍(淸風)에게 주고 

반 칸은 명월(明月)에게 주니 

청산(靑山)은 들일 때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독락당(獨樂堂)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북편 600m거리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뒤 거처한 건물이다.. 중종11년(1516)에 지어졌으며

낮은 기단위에 세운 앞면 4칸 옆면2간 규모이다.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놓았으며,왼쪽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칸동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으로 보아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독락당 앞쪽 담장에는 좁은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창을 달아 이창을 통해서 앞내물을 

바라보게 한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수있다.

 


이언적 선생이 거쳐하는 사랑채인 독락당에서 계곡쪽으로 담장에 창살이 있는 특이한 구조다..

자연 계곡을 내부로 끌어들여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를 함께하고자 했던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고택들을 돌아보긴 했으나 담장에 창이 있는 구조는 처음 접한것 같다.


계정(계정)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제40호)

 

정혜사지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1층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이상은 마치 1층탑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그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돌로 만들어 놓았고,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있다.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탑은  13층이라는 보기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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